#크리미-카타스트로피

박현호

작업은 나의 기억 속 트라우마를 잠재우고 그것의 이미지를 보다 다른 기억으로 대체함으로서 스스로를 끌어안아주는 과정이다. 그것은 때로 트라우마의 감각을 시각적으로 그대로 드러내는 것에서 시작되곤 한다. 여기에 주로 해일이나 큰 파도, 오로라, 운석 등 재해의 이미지와 그것 속에 우두커니 존재하는 인간 신체가 비틀린 채로 존재한다. 이것은 지난날의 나의 트라우마 속 나의 자화상이기도 하며, 지금을 살아가는 오늘날의 고독과 마음 속 어려움의 시각화이기도 하다. 이러한 것들은 죽음의 공포로서의 물, 정화적 매체나 시각적 쾌로서의 물의 이미지, 그리고 거대한 자연풍경이미지나, 나의 마음 내면의 나약한 인간신체의 자화상 드로잉으로 표현된다.

나는 몇 년 전에 큰마음의 상처로 우울증과 자살시도를 하는 트라우마를 겪었다. 이때 누워있던 내게 온몸에 물이 덮치는 듯한 환상 속에 허우적대는 경험을 하였고 지금까지 나에게 물과 나약한 자화상의 모티브가 되고 있다.

다만, 그때의 트라우마를 치료 하는 데에도 물의 이미지를 사용하게 되었고, 이렇게 나에게 물과 자연 풍경의 이미지는 죽음과 삶, 시각적 쾌로의 의미를 모두 내포하게 되었다.

정신과 입원 시에 받았던 충격이나 상처 입은 나의 감정적 조각들을 추스르는데 2년의 시간을 보냈다. 그러한 과정에서 그렸던 드로잉이나 작은 스케치들을, 그때의 기억과 함께 비로소 다시 꺼내어, ‘시각적 위로의 이미지’로 만드는 과정은 내게 또 하나의 도전이 되고 있다.

지나간 감정과 감각은 기억 속에서 다듬어지고, 비유로서 남아있게 되었고, 그것은 있는 그대로의 사건이 아닌, 재해와 재앙의 이미지, 혹은 거대한 자연 속 풍경에 비틀어진 신체의 병치하는 이미지로 상징화되어 표출된다.

나는 이러한 상징화된 이미지를 ‘크리미-카타스트로피(creamy-catastrophe)’라고 명명하고 싶다. 이러한 크리미-카타스트로피들은 이전의 리얼했던 재앙의 기억을 보다 화려하고 부드러운 이미지로 덮어씌워낸다. 나는 부드러운 재앙의 이미지가 큰 재앙의 기억을 덮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점차 화려하고 부드러운 이미지로 바꾸어 표현함으로서 이전에 내게 남았던 상처의 이미지가 완화된 이미지로 대체되길 희망한다.

#기억 치환을 염원하는 잔불의 낙서, 잔불로서의 마음가짐, 감정의 잿 가루들.

그림을 그리는 것은 마치 잔불을 놓는 것 같다. 큰불이나 센 불이 아니라 잔불로 계속해서 하나 둘 시간의 잔불을 들여놓아 방을 덥히는 것과 같다. 너무 뜨거워도 안 되고 너무 차가워도 안 되는 적당한 거리두기의 상태. 불이 거세게 일어난 뒤에 시간이 지나 사그라드는 것들을 이미지로 붙잡아 놓는 행동. 그것이 잔불로서의 이미지 그리기이다.

누군가는 그것을 시체라고 하고 누군가는 머리가 맞은 뒤의 표현이라고 하는데, 나의 그림은 적당히 어떠한 사건으로부터 시간이 지난 뒤 나의 잔불 같은 마음을 짓이겨 그림에 잡아두는 행동이라고 보는 게 좋을 듯싶다.

너무 타오르지도 않고 그렇다고 식지는 않은. 온기는 남은 채 서서히 꺼지는 그런 것. 그러나 다시 불씨가 살아날 가능성도 있는 상태. 그러한 잔불 같은 기억과 마음과 감성이, 나에게 그림을 그리게 한다.

나는 더 뜨겁지도, 아주 식지도 않은 나의 상태를 포착하려 애쓰고 있다.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가고 남은 감정의 잿 가루들을 시간이라는 바인더에 섞어서 화면에 엮어낸다.

#나약함에 대해서 나약하지 않게 그리기

나의 몸은 무르고, 나약했다. 감정에 쉽게 휘둘리고, 억울함을 참지 못하는 나는 그저 ‘나약한 놈1’ 이었다. 이렇듯 나약함이란 몸만 약한게 아니었다. 스스로에게 약한 마음, 무른 마음을 가진 사람이다. 때론 그런 생각을 했었다. ‘내가 아주 아주 나약해지면 어떤 면죄부를 받아서, 세상에 필요 없는 자유로운 사람이 되지 않을까?’라고. 나는 그런 생각을 하는 나조차 받아들이기 어려웠고 그것을 거부하여 아무런 이미지도 만들 수 없었다. 그러나 그림의 문을 열며 이 상황과 나의 나약함을 받아들이기 시작했고 그것들을 이내 힘차게 그리기 시작한다. 나약한 이미지이지만 힘찬 형태와 두꺼운 질감의 선, 텍스쳐 들은 그렇게 나약한 자화상을 영구적인 캔버스에 박제시켜 주었다. 이것은 나약했음을 기억하고, 나약함을 표현하지만, 결코 나약하지 않은 그림들이 되고 있다.

#과거의 기억을 현재의 감각으로 표현하기

과거의 기억과 그때의 감각, 감정을 되살리는 과정에서 지금의 나의 상태가 영향을 주며 색과 형태가 결정된다. 그러한 것들은 지난날의 기억의 원형은 바뀌지 않더라도 그것의 색과 몇몇의 표현들은 변화 가능함을 보여준다. 나는 이러한 기억을 그림으로 옮길 때, 이미지를 긁고, 흠집 내거나 그려낸 이미지를 파내고, 다시 물감으로 덮어씌우는 과정을 반복한다. 그러면서도 기억에 자리 잡았던, 꽤나 오래간 뇌리에 박혔던 형상의 틀은 유지하려 한다.

망치로 얻어맞은 뒤 망치에 얻어맞음을 그림으로 시인할 수 있게 된 나의 회복에 감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