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일페인팅 - 망설임의 매체
유화는 망설임의 매체이다.
유화를 그리는데에는 시간이 필요하다.
안료와 기름이 공기중에 산화되어 표면과 유착되는데 걸리는 꽤나 긴 시간.
한숨과 고민과 망설임의 시간적 층위를
물감과 물감 사이에 만든다.
시간의 층위, 그리고 감성의 층위. 여러 층위의 망설임들이 이루는 결과로서의 모호함이 화면에 남는다.
결과적 모호함은 그림의 목적이 아니다. 나는 모호한 회화를 그리지않는다.
다만 결과적으로 그림은 모호해진다. 이건 여러 층위와 시간을 압축할 때 생기는 당연한 결과이다.
그러나 모호함은 내 그림의 결과이지 목적이 아니다. 내 그림의 목적은 그러한 자유로운 망설임들이 이루는 일련의 층위들을 매력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설치와 컨셉추얼 아트를 할때에는 사회적 목적과 명료한 메세지의 효과적인 전달이 중요했다.
그런데 유화와 그림은 그렇지않다. 그것에는 적합치않았다.
하나의 화면에 여러 시간의 망설일 기회를 얻는 것- 그것이 그림그리기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 중 한두가지의 확신이 쌓이는 것 - 확신과 확신 사이의 망설임의 자욱. 그것이 그림이라는 결과물이 된다.
Oil Painting - Media of hesitation
Oil painting is a medium of hesitation.
It takes time to draw oil paintings.
Quite a long time it takes for pigments and oils to oxidize into the air and adhere to the surface.
The temporal layer of sigh, agony, and hesitation is made between stroke and stroke.
The layer of time and the layer of emotion. The ambiguity as a result of various levels of hesitation remains on the screen.
Consequential ambiguity is not the purpose of the picture. I don't draw ambiguous paintings.
However, as a result, the picture becomes ambiguous. This is a natural result of compressing several layers and time.
But ambiguity is the result of my painting, not the purpose. The purpose of my painting is to attractively show a series of layers of such free hesitation.
When installing and conceptual art, effective delivery of social purposes and clear messages was important.
By the way, oil paintings and paintings are not. It was not suitable for that.
Getting a chance to hesitate for several hours on a single screen-I think that's drawing.
And one or two of them build-up of hesitation between conviction and conviction. It becomes the result of a pictu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