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희미하게 휘발해가는 인상의 장면을 붙잡아간다.
유연하고 연약하여 차차 사라져도 알지 못할 그러한 인상들. 피곤한 눈으로 출근할 때에 차창 밖으로 보이는 탁한 건물들. 그 사이로 희미하게 스며드는 일출. 밤길에 걷다가 맡은 등나무 꽃의 향기. 연인과 포옹하며 잠들 때의 두근거림과 어색함. 돌아가신 할머니를 기념하며 여행을 간 섬에서 본 유채꽃밭의 노오란 냄새 등‧‧‧. 잠시의 강렬함을 남겼다가 연약하기 짝이 없이 날아가는 감정들. 그런 것들을 물감으로 붙잡으려 하고 있다. 그것은 나의 붓질과 물감, 바인더로 인하여 섞이고 하나의 덩어리로 얽혀져간다. 하나의 붓질이 하나의 기록이라고 할 때, 나의 기억들의 실마리가 하나둘 쌓여가며 형상을 지탱하는 것을 상상하며 그림을 그린다.

이것들은 느슨해진 망각의 막을 뚫고 올라오는 돌발적인 장면들이다. 결국 나의 뇌리 속에 안착되거나, 혹은 안착되지 못하여 날아가는 들뜬 표층 기억들의 일부이다. 이전에 <마이 랜드>에서 보인 것 같이, 지나간 트라우마의 어려움을 장식화여 표면으로 보내는 행위는 기억장면의 변모로서 보여졌는데, 그 뒤에 일어나는 기억에 대한 행위들은 일련의 ‘기억 붙잡기’가 아닐까 싶다. 그러나 나는 붙잡은 기억들을 다시 빠른 속도의 손짓으로 흩어놓는다.

둘러싸인 포옹의 흐릿한 껍데기 : 느슨한, 헐렁한, 들 뜬 결합의 이미지

나는 인상 속 장면을 있는 그대로 반영하려고 그림을 그렸으나, 자주 그것을 큰 붓으로 밀어버리곤 한다. 또 붓질 위에 나이프로 물감을 안착시키지 않고 얹어 놓고는 한다. 있는 그대로의 장면을 담는 것은 장면의 재현으로서 가치가 있지만, 내가 원하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다. 장면을 본 나의 기억 너머의 느슨한 결합으로서의 이미지들. 이것들은 <기억의 표피>에서 이미 가죽 회화로서 시작되었고, <흐린 눈 속의 일출>, <둘러싸인 포옹의 흐릿한 껍데기>를 통하여 표현하려 하고 있다.

인상의 기억들은 나에게 다가오고, 나를 둘러싸며, 포옹한다. 그리고 이내 눈을 통하여 나갔다가 들어 왔다를 반복하다가 손을 통하여 나간다. 그것들은 마치 기억의 표피에 덜 안착된 장면처럼, 화면의 표면에 맺힌 물질로서의 붓질을 남긴다.




<흐린 눈 속의 일출>, 112 × 193cm, 캔버스에 유채, 2023
<둘러싸인 포옹의 흐릿한 껍데기>, 193 × 112cm, 캔버스에 유채, 2023
<튤립과 조팝나무>, 61 × 38cm, 캔버스에 유채, 2023
<유채꽃밭>, 61 × 38cm, 캔버스에 유채, 2023
<등나무 꽃>, 55 × 46cm, 캔버스에 유채, 2023
<들풀 사이로 흔들리는 너의 눈>, 24 × 24cm, 캔버스에 유채, 2023
<기억의 눈>, 137 × 200cm, 인조 가죽 위에 유채, 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