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엔 충격이었다. 이런 폐허에 사람이 살다니.
그리고 여기에 내가 살아야 한다니.
그러나 이곳에 시간을 매일수록
나는 이곳이 사랑스러워 졌고
이곳을 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생산과 파괴가 동시에 이루어지는 현장. 공사장.
그리고 나의 집. 삶의터전이었기에 나는 언제나 긴장해야 했다.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나의 터전.
그곳의 기록들. 아카이빙. 그리고 공유 드로잉.
가장 생산적인 현장. 삶의 터전을 부수고 다시 짓는 재건축 현장. 나의 익숙한 곳. 항상보던 것.
한번에 모든것이 사라졌다가 다시시작되는 죽음과 재생성의 공간. 기능의 죽음. 다시 부활하는 곳.

무에서 유가 나오는 기간. 공사와 공사장. 우리집의 감각을 투영. 항상 보다. 우리집의 죽음을. 그리고 재탄생을 위한 투기. 투자기다림 열망. 헛된 것과 믿음사이.

이런 공간에 생기를 우리집 -죽기직전의-에 가져왔으면.
소리를. 움직임을. 냄새를. 빛으로 상징되는 생명력들.

사라지는 것들의 생존적 몸부림

언제나 생각한다.

옆집이 사라지듯이 우리 집도 사라질까?

이 질문은 내가 서부이촌동에 처음 왔을 때부터 지금까지 언제나 내안에 떠도는 생각이다. 2012년 내가 처음 이 동네에 왔을 때, 내게 이곳은 죽어있는 모습이었다. 잘 정돈된 나무가 울창한 목동에서 암 같은 빚더미 집을 뿌리치고 온 후로 우리가족도 죽어있었다. 너무나 오래되고 작은 집.. 이라기에도 할 수 없는 창고로 이사왔던 나와 가족들은, 대부분의 가구들을 버려야만 했다. 난방도, 온수도나오지 않는 겨울. 물을 끓여서 세수와 집을 덥히는 작업은 목동아줌마 였던 우리엄마에게 큰 충격이었다. 가족들은 하나의 방에 모두 모여서 자야했고, 나는 집이 싫어서 밤을 새기 일쑤였다.

불안.

이곳에서 나가고 싶다. 그런데 이곳도 사라질지 모른다. 이곳은 개발될 수도 없다.

“이곳은 용산 국제업무지구로 곧 통합개발되어 서울시에게 먹힌다.” “서울시에서 돈도 주지않고 내쫓을 것이다.” “드림허브가 우리를 망하게 한다.” 등등.. 당시 주민들의 목소리와 시위글귀만 보아도, 아버지가 하는 말씀만 들어도 나는 이 동네가 곧 사라질, 위태로운 곳임을 알 수 있었다.

사람들은 모두 슬럼가의 사람들처럼, 회색빛에 무서웠다. 가끔 보이는 파지줍는 할머니들은 버리는 모든 것을 가져갔고, 슈퍼아주머니는 자기가 강도한테 칼질을 해서 물러갔다는 이야기를 농담처럼 이야기했다.

모든게 적응이 되지 않았다.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해야 했다.

창고를 개조해서 집을 만드는일이 가장 힘들었다. 벽을 뚫어서 환기구를 만들고, 가스를 설치하고, 변기를 설치하고... 바닥 난방이 없어서 매번 가스난로와 LPG가스를 사야했다.

서부이촌동은 동부이촌동과 한강대교 하나를 두고 붙어있는 동네였지만, 아무도 투자하거나 이사오지 않는 동네였다. 동네 전체가 높이 15미터정도의 차단벽으로 가려져 있어 안에서는 밖을 볼수 없었고, 밖에서도 안을 볼 수 없었다. 용산 국제 업무지구 라는 서울시 사업의 목적으로 공사벽을 쳐놨지만, 공사가 되는지는 알 수 없다. 그렇기에 부동산들은 매매를 전혀 할수 없었고 새로오는 사람도 없었다.

우리가족은 또 어딘가로 내몰릴 걱정으로 약1년을 거기서 지냈다.

그렇게 2013년이 되었다.

사람들은 매주 방태산이라는 음식점 옆에서 시위를 했다. 아파트벽과 공사장벽에도 시위 현수막들이 즐비했다. 다들 재건축을 위한 공사를 바랐는데, 이제는 어떤 공사라도 멈출 수 밖에없는 현실이 슬펐다. 시위가 점점더 잦아지고, 아버지도 재건축 반대 위원으로 참가하셨다. 드림허브라는 건축사가 항상 와서 방해를 한다고 했다....

그렇게 약 1년간, 나는 이 동네의 이방인처럼 살았다. 도저히 동네주민이라고 이야기하고 다니기도 창피했고, 이곳에 잠시 밤에만 머무는 손님처럼 살았다. 대신 너무나 충격적인 동네를 기록해야 했다고 생각해서 사진을 자주 찍곤했다.

그렇게 2013년 9월경이 되자, 시위소리가 멈추었다. 드림허브라는 건축회사가 스스로 파산을 하면서 10조에 달하는 사업이 무산된 것이다. 주민들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러나 역시 어떠한 새로운 개발을 한다는 이야기도 존재하지 않았다. 겨우 다시, 원점이었다.

조금 나아진 점은, 우리집이 2층짜리 난방과 온수가 나오는 월세집으로 이사했다는 점이었다. 따듯한 물하나 나오는 것이 이렇게 행복할 수 없었으면서도, 이런것에 감사하는 내자신이 초라해보이기도 했다.

살아내려는 몸부림들. 곧 버려질 것 같은 자재들이 안간힘을 쓰며 움직인다. 파괴적인 고깔과 공사용 벽은 굉음을 내고 파열하며, 환풍 장치는 자신의 힘을 다해 바람을 불어 넣는다. 쇠기둥은 좌우로 쓰러질 듯, 중심을 잡으려 안간힘을 낸다. 그 와중에 절뚝거리는 절름발이는 절뚝절뚝 외발로 비상구 주변을 맴돌고, 다른 것은 손짓하듯 살살 벽을 향해 손짓한다. 이것들은 모두 자신들이 아직 존재한다는 것을 애써 알리듯 굉장한 소음을 지속적으로 뿜어낸다. 이 오브제들은, 재건축의 기로에 놓여있는지 10년이 된 나의 삶의 터전, 용산의 건축현장에서 가져온 것으로, 생성과 소멸의 과도기에있는 장소의 성격을 암시한다.

사진과 영상에는 재건축현장이 되지못하여 남아있는 동네와, 재건축을 위해 부서진 장소가 함께 제시된다.

경양식. 이사하는 날.

2012년 처음 서부이촌동에 이사오던 날, 아버지는 내게 경양식을 사주셨다. 동네의 유일한 식당이었다. 인부아저씨들이 작은집으로 이사가는 우리를 비웃지 않도록, 엄마도 적잖이 애를쓰셨다. 아저씨들께 밥도 대접하고 술도 대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부아저씨들은 불평불만을 토로했다. 나중에 알게되었지만, 식기나 가구 몇 가지 없어졌다. 비가오는 추운날이었다. 우리는 아끼던 장롱하나가 들어가지 않아 부숴야만 했다. 소파도 방에 다 들어가지 않아서 세워놓고 침대를 놓으니 아무데도 서있을 자리가 없었다. 마치 가구를 위한 방과 같았고, 이제는 이런 거대한 것들이 삶에 별 쓸모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대리석으로 만든 12인용 식탁이 그렇게 쓸모없고 무거웠는지 이제 알았다. 생채기라도 날까 걱정했는데 이젠 막쓰는 돌식탁. 많은것들이 아쉬워서 우리가족은 .. 대부분의 것들을 창고로 보내놓고 서서히 썩혔다.

처음 집이라고 들어갈 곳은, 아파트의 왼편 틈에 마련된 곰팡이가 즐비한 오래된 창고였다. 지네와 개미등... 각종 벌레들이 득실거리고, 문들이 모두 슬레이트로 된, 아주 고약한 곳이었다. 화장실은 간이식으로 만들었고, 변기도 푸쇄식이었고, 세면대 따위는 놓을 수도 없는 비좁은 곳이었다. 가스도, 전기도, 난방도 들어오지 않았기에 우리는 커다란 거실에서 전기난로와 가스난로를 틀고 잠을 청해야 했다. 각자 잘 수 있는 방따위는 없었다. 모두가 모여서 잤다. 자리가 부족해서 아버지는 따로 밖에나가서 주무시거나, 내가 집을 나가서 배회하곤 했다.

그러한 상황에서 학교는 나에게 유토피아였고, 완벽하게 작업에 몰두할 수 있는 천국이었다. 매일 밤마다 결코, 집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집에는 온통 곰팡이가 피어있었고 비가 오면 새며 화장실엔 벌레도 많았다. 여름에는 모기로 너무나 고통받았고 쥐도 있는거같았다. 거미줄은 말할 것도없다.

주차싸움.

창고의 지하에는 아파트 정화조가 있어서 집 앞에 차를 대면 무너질 위험이 있었다. 그러나 1층 창고(아무도 집이라고 생각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앞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몰래 차를대곤 했다. 그럴 때 마다 나나 부모님, 할머니는 교대로 나가서 차를 물리치는 것이 중요한 하루 일과였다. 여기마저 무너져선 안되었다.

그때부터 왜 사람들이 차를 세울 공간에 의자며, 화분이며, 유모차 등을 세워놓는지 공감할 수 있었다. 이곳은 교통카메라조차 없는 사각지대기 때문에, 근처의 사람들이 고급차를 몰래 세우고 도망가기 일쑤였기 때문이다(사진 첨부).

당시에는 이곳에 산다는 것이 믿기지 않아서, 그리고 이곳에 사는 것이 너무나 창피해서 조용히 지냈다.

마을 할머니들.

창고집 건너편에 마찬가지로 창고집에 사는 할머니 한분이 계셨다. 아파트가 50년전에 지어진 터라, 방음 따위가 되지 않았는데(2009년에 재난등급 D등급을 받았다), 여름저녁이면 항상 동네 파지줍는 할머니들을 불러모으곤 하셨다. 할머니들의 수다는 끝날 생각을 하지않았고, 적잖이 시끄러웠다. 또 슬레이트 문을 열고 환기를 하려는 우리엄마는 집안이 보이는 것이 싫어하셨는데, 그래서 항상 옆집 할머니와 싸웠다. 그런데 우리는 마냥 싸울 수 없었던게, 그 할머니집 창고에 우리집 짐들을 한달에 6만원 내고 넣어놨기 때문이었다. 심사가 틀어지기만 하면 짐빼라고 부심을 부리곤 하셨다.

세입자.

할머니가 돌아가실 뻔 했다. 집에 할머니만 계신 틈을 타, 1동 304호에 살고 있던 세입자가 할머니를 해치려고 찾아온 것이다. 세입자 가족 대신에 우리가족이 들어가려고 했던 것이 화근이었다. 본인은 협박만 하겠다고 온거 라는데, 할머니는 쓰러지셨고 병원에 실려 가셨다. 당시 나는 집이 싫어서 항상 밖으로 나다니는 때였기에 당시에도 집에 없었다. 부모님은 그런 내가 원망스러웠는지 하루종일 어딜 그렇게 싸돌아 다니냐고 하셨다. 나는 할말이 없었지만 집이 싫어서라고 말할 입도 없었다.

그림들.

엄마가 그렸던 그림들, 내가 그렸던 그림들이 그렇게 쓸모없고 자리만 차지하는 것으로 보일 수가. 참 슬펐다. 무엇을 위하여 그토록 그리고, 남겨두고, 애지중지하는 것이었을까. 미술이 우리 삶에 얼마나 도움이 되는 걸까. 거지가 되면 작품이 필요할까. 그런 생각들이 들기 시작했다.

더 이상 캔버스에 그림을 그리는 것이 너무나 싫었다.

사치에 사치를 바르는 생각이 들었다. 내겐 그걸 살돈이, 보관할 여력이 없었다.

나의 상황과 맞는, 내주변의 재료들을 찾기 시작했다.

가장 싸고 날티나는 재료들. 비닐, 신문지, 테이프, 슬레이트... 연약하고 모양이 마구변하는 재료들. 그러면서 힘이없는 것이 나와비슷한 처지에 있는 느낌이었다.

쓰레기.

쓰레기를 줍기 시작한다. 쓰레기가 쓰레기로 되는 것은 사치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당시에 나를위한 사치품은 쓰레기였다. 하나, 둘.. 줍기시작한건 그때부터인거 같다. 무언가라도 소유하고싶었을까. 아니, 아버지어머니를 닮아서 그런지도 모른다.

집이 허름해서 오히려 중고물품들 줏어오기 편했는지 모른다.

아버지는 매일 어디서났는지도 모를 티비, 라디오, 운동기구, 연탄난로 등을 줏어오셨다.

내가 몸이안좋아 휴학을 하고 창고집에서 그림을 그릴때면 옆에는 항상 줏어온 부속품들과, 시멘트로된 바닥과, 추위를 막기위한 발포단단열재재들이 섞여있었다. 불이나면 굉장히위험한. 거기서 연탄난로를 피고 겁도없이 유화를 그렸다.

유화를 그리는 것은 내겐 사치였다.

사치였다.

나는 절대로 쓰레기를 줍지 않기로 마음먹었었다.

그런 것들을 줍는 행위는 밖의 파지 줍는 할머니들과 다를바 없는 아주 슬픈 행위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결국 나는 쓰레기를 줍게 되었다.
아니 나는 쓰레기를 줍는 것이 아니다.
있는 그대로의 나의 파편을 주워 모으기 시작한거다.
있는 그대로, 현실을 인정하고 그대로 보여주는 것.
그것이 얼마나 시원한지 모른다. 더이상 아름다운 쓰레기들을, 비싼 쓰레기를 만들 자신은 없다.

무에서 시작해서 다시 무로 돌아가도 뭐라 안할 쓰레기로 작업하는게 홀가분하다.

나를 보다 솔직하게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임시적 오브제들.

성촌공원.

서부이촌동 성촌공원에는 묘한 매력이 있다. 둘레 400미터가 채 안되는 작은 공원이지만 이곳을 한바퀴 돌면 마음이 싱싱해진다. 그도그럴것이 사계절마다 각각 변하는 너무나 다양한 종류의 식물이 자라기 때문인데, 겨울에는 빨간 능금부터 시작해서 다양한 종류의 회양목과 풀들, 꽃들 은행나무 단풍나무 상수리나무 소나무 잣나무 모과나무 등등 혹은 이름도 알지못하는 짧고 긴 나무들이 즐비하다. 이때문에 아침마다 새들이 돌아다니며 지저귀고, 보기흔치않은 새들도 간혹있다. 봄에는 나비가 득실거리고 여름엔 매미 부엉이도 있다. 이곳을 한번 돌면 화가 풀리고. 두번돌면 시름이 풀리고 세번돌면 마음이 시원해진다(네번이상 돌면 노래가나온다!) 집에있기만해도 우울할때 나오면 아주 특효약이다. 작업구상이 안될때도 집앞 5미터에 있기에 자주 나온다. 썩고 낡은 집이지만 근린시설은 모두갖추었다. 신기한동네. +앞에 있으면 한강도 나오는 것!

재밌는 것은 25년전 엄마와 아빠가 프로포즈를 한 그곳이라는 것이다. 당신들께서는 25년후에 이곳에 다시올 줄 아셨을까.

이곳은 관리가 잘되기도하지만 흙이나 풀을밟고 길을만드는게 자유다. 그래서 길로 구지안다녀도되는 무법지공원이다.

마사회.

마사회가 들어올때 이야기다. 당시에는 엄청난 반발. 시위 . 여전한 시위였다 . 그런데 세월호 노란리본이. 무슨연관성? 아직도.이익에 따른 시위들. 무서운. 속고 속이는 과대과장.

집들.

동네에 와서 가장 신기했던 풍경들 중 하나는 바로 집들의 모양새 였다.

이놈의 집들은 모두 7년째 개발이 묶여있었기 때문에, 어떻게는 새로 지을 수 없는 처지였다. 그렇기에 주민들은 조금씩 조금씩 50년이나 된 집들을 보수해가며 자신만의 감각으로 개조해 나갔다. 일단 모든 집들은 문과 창문이 각각 달랐다. 1층의 창고를 개조한 집들은 모두 천막을 설치하고, 그곳에 화분이며 주워온 공사폐기물등을 쌓아놓곤 했다. 컴퓨터나 고철등을 모아서 팔기위해 놓는 집, 파지줍는 할머니네 집은 언제나 파지로 가득했다. 큰 아파트에서 자기집 만큼만 다른색으로 벽을 칠한집,

말해선 안된다.

우리집 부모님들이 모두 재건축 시위를 하실 때, 나도 그것에 참여하고 어떤 것이 문제인지 알고 싶었다. 그러나 당시 나는 rotc훈련을 받은 사관후보생도 였기 때문에, 정치적 견해나 자신의 반 정부적 의견을 어디에도 내비쳐선 안됬다. 그렇기에 SNS에도 정부 비판적 기사를 자주 올리는 친구들의 글에도 좋다는 표시조차 할 수 없었고, 나의 상황(서울시 통합개발에 대한 주민들의 의견 등)을 누군가에게 직접적으로 발설해도 안되었다. 시위에도 참여할 수 없었다. 나는 그저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에대한 옵저버(observer)였다.

말할 입을 다물었다.

그것에는 우리집의 경제적 상황에 대한 일말의 창피함도 한몫했다고 본다.

이러한 이유로, 나는 작품에서 이런 이야기를 담을 수 없었다. 때문에 나의 불안과 집을 잃어버릴 것에대한 공포를 추상적인 이미지로 그려내기 시작했고, 자연이나 내 마음에 평정을 주기위한 이미지들을 애써 덧씌워 작품을 제작했다. 마음의 고통을 치유해주는 것은, 자연여행이긴 하였지만, 결코 그것 자체가 내 삶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작품은 내가하고자 하는 이야기와 동떨어져서, 무엇인지 모를 구형의 우울하고 아름다운 이미지로 허공을 맴돌았다. 기저의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점점 할 수 없게되자, 점점 더 작품은 형식적인 부분으로 치달았고, 남들은 아름다워 보이는 붕붕 떠있기만한 이미지를 매력적이라고 했다.

동네의 시위 사진을 몰래 담는 것이 내게는 작은 탈출구였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나는 비판적인 언어를 할수없이 형식탐구만 매진 하게되었다.

그런 내자신이 싫었지만, 그것이 나의 최선의 탈출구였다.

항상 적당히 나의 이야기를 가리기 시작했다.

시적인 조각을 하게된 것도 그때 부터였던 것같다.

파지줍는 사람들.

동네 주민들은 낮이나 밤이나 할 것 없이 물건을 줍고다닌다. 우리동네에는 특히 노인들이 많이사시는데, 항상 파지나 고물등을 주워서 파는 것이 그들의 중요한 일과였다. 파지줍는 노인들은 누구보다도 동네의 구석구석을 잘 아시는 분들이다. 어디서 파지를 그토록 모았는지, 항상 파지를 수레로 끌고 다닌다. 파지 계(界)에도 각자의 영역이 있어서, 남몰래 파지를 주워가다가 들키면 서로 싸움이 나곤 한다. 파지를 옮기는 방식도 조금씩 다른데, 나이많은 할머니 할아버지는 유모차나 (보다전문적인 분들은)수레로, 젊은 할머니들은 지프차에 실어 나르기도 하신다.

그러나 꼭 파지만 줍는 것도 아니고, 또 노인들만 줍는 것도 아니다. 주민들이 서로 밖에 내다놓은 모든 것-철근, 시멘트덩어리, 나무, 타일, 자동차 유리, 화분, 창틀, 침대, 티비, 컴퓨터, 냉장고, 에어컨 등 온갖 가구, 그릇 등 식자재들...-을 모두 다 줍는다. 밖에 물건을 내다놓으면 30분이면 사라질 때가 많다. 동네 사람들은 이런 물건들을 모아서 때로 자신의 작은 마당에 전시하거나, 집을 보수하거나, 혹은 벽어딘가에 쌓아놓고 그물을 쳐둔다. 주운 물건으로 무언가를 만들어놓은 집들을 보면, 기발함에 감탄이 절로 나온다.

항상 유모차를 끌고, 수레를 끌고, 혹은 주운 물건을 들고 다니는 사람들. 무엇을 위하여 저토록 모으는 것일까. 꼭 파는 것만이 아닌, 저 행위 자체가 어떤 의미가 있는 게 아닐까. 살아있다는, 주울 수 있다는 것에 매달리는 건 아닐까. 저 행위를 나도 따라하게 될까. 그런 생각을 하곤 한다.

임시적 거처, 임시적 행동들.

학군단이라는 집단은 정말 묘했다. 나는 약 2년간 학군단 생활관이라는 임시거처에서 살 수 있는 특별한 기회를 얻었다. 생활관은 말 그대로 커다란 방에 2층 침대 다섯 개 정도만 있는 임시 거처였다. 학군단의 전반적인 생활이 이러했다. 방학 때마다 훈련을 가도, 약 2주에서 4주 동안 처음 보는, 임시적으로 짜여진 구성원들과 피와 땀을 나누며 가까워 져야했다. 그렇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었다. 약 한달 간 임시 거처를 받고 훈련하는 훈련장. 새로 땀을 나누는 얕고 가벼운 관계들. 훈련이 끝나면 다시금 보지 않을 것을 알고있는데, 전략적인 동맹들. 임시적인 매너, 임시적인 행동들 투성이였다.

훈련을 마치고 돌아올 때면, 역시나 임시적인 나의 집 상황과 맞딱뜨린다.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건물들.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가게들. 용산역 앞에서 시위하던 포장마차들은 얌전히 장사를 하지만, 그것들이 곧 사라질 것은 다들 아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이것들이 정말 임시적일까?

임시적이지만 다들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고, 사라지지도 않고, 새로 무언가가 생기지도 않는다. 이미 10년간 그래오고 있어서, 새로운 바람이 불지도 이제는 모르겠다.

질질 끌고 있다.

용산역 포차들.

용산역 앞 포차들은 집창촌이 사라지던 즈음에 같이 사라질 위기에 있었다. 엄청난 시위를 겪고나서야, 선택된 몇 집만이 세련된 임시 포차를 배정 받았다. 2년, 3년..... 포차들은 정말 장사가 잘 되었고, 마치 실제 건물처럼 꾸며쳐 있어서 곧 사라진다 사라진다 해도, 금방 없어질거 같지 않았다.

어느 날, 3년이 끝나고, 2016년 3월 초. 하루아침에 포차가 철거 되었다. 운좋게도 포차영상을 찍을 수 있었는데, 영상을 찍으러 들어간 포차는 매우 이상했다. 전혀 나갈 준비가 안되었던 듯, 방금 전까지도 장사를 한 듯이 보였다. 철거되기 직전가지 장사를 한 것이다. 가게의 표부터, 장식들, 식기들까지 그대로였다. 마치 전쟁이 나서 도망간 것 같았다. 없는 것은 손님과 전기, 그리고 약간의 기자재들이 널부러져 있다는 것.

포차들이 내부를 비우자마자 하이에나같이 고물상 사람들이 남은 물건들을 챙기러 왔다. 나와 아버지도 대담하게, 몇 가지 작업에 쓸 부품들을 챙겨왔다. 다들 허락을 받고 가져가길래 간단히 허락을 받고 가져왔다.

당시에는 기분좋게 공짜 부품들을 챙겨왔는데, 생각해보니 남일이 아니었다. 용산역 부근은 우리집 바로 근방이었다. 임시의 거처들이 사라지는 것을 보며 나는 다시 생각했다.

‘아 우리도 없어질지 모른다.’

쌀집과 가스집, 물집

어머니와 아버지는 새로이사온 후로 남을 대하는 태도가 많이 달라지셨다. 교사로서의 자존심과 예의보다는 좀더 친근하고 때로 겁 없이 사람들에게 대하기 시작하셨다. 그중에 하나가 ‘외상’이었다. 우리집은 좀처럼 외상이란 것을 하지 않았었는데, 쌀집과 가스연탄집, 물파는 집에 모두 외상을 하곤했다. 이 동네는 단돈 몇백원도 외상이 가능하고, 얼굴만 봐도 기억을 잘 하시기 때문에 장부가 필요없다. 전에 슈퍼에 200원 외상을 지신 아버지가 외상값고 왔다고 하셔서 한참 웃은 적이 있다. 귀여운 동네다.

헬스장

이촌 2동(서부이촌동) 주민센터 헬스장. 처음 갔을 때는 시설도 낡아보이고 좁고, 기구도 별로 없어서 무시하는 마음이 들었다. 아주머니도 아주 불친절하고(요새말로 시크-) 내가 등록해도 아무관심 없어보였다.

이 헬스장은 대개 할머니, 할아버지, 아저씨 아주머니등 젊은사람이 거의 없었다. 때문에 누군가의 눈치를 보거나, 경쟁심등은 일어나지 않았다. 일일권으로 하루 이틀 간 이후에, 나는 그 관심없음이 너무나 편함을 느꼈다. 혼자 편하게 있을 수 있는 공간이 생긴 것이다. 하루는 헬스장이 닫을 즈음 급하게 운동을 하러간 적이 있었다. 5천원을 받으신 카운터 아주머니는 운동을 마치기도 전에 돈을 돌려주셨다. “담부턴 늦지마세요, 오늘은 안온걸로 해줄게.” 시크하게만 구셨던 아주머니도 사실 잔정이 있다고 깨달았다. 항상 모든 시설은 정당한 돈을 내야만 이용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인식도 깨지고, 동네 사람들이 겉으로는 얄굳게 말하는 사람이 많았었지만, 사실 따듯한 사람들 이라는 인식이 조금씩 들게된 연유다.

헬스장에서 아들걱정하던 아주머니. 서울대다닌다고 하니까 이것저것 물어보셨다. 아들이 8월인데 수시를 안쓴다고... (아이고) 나중에 결과가 잘안되었나 보다. 머쓱해졌다.

서부이촌동 사람들

헬스장 아주머니만이 아니라, 이 동네 사람들은 불친절한 매력이 있다. 다들 조용하게 동네를 돌아다니거나, 파지를 줍거나 슈퍼, 고물상 등을 운영하지만 말을 걸면 또 곧잘 대답해 주었다(물론 싸움도 잘하셨다). 특히 1층창고를 개조해서 만든 형제슈퍼와 삼흥슈퍼 아주머니는 재밌는 분들이다. 삼흥슈퍼 아주머니는 아주 무섭게 생기시고 목소리도 걸걸하신 여자 대장부다. 전에 처음 이사왔을 때는 강도가 들어와서 식칼로 강도를 공격해서 물리쳤다는 이야기로 충격을 주었지만, 날씨가 좋을 때는 날씨가 좋다고, 구질 때는 구지다고 곧잘 말을 걸어주신다. 이 슈퍼는 물건이 제각각인게, 팔리면 팔고 안팔리면 두는 스타일이라 재고가 없을 때도 많다. 파는 물건도 아주머니 맘대로 판다. 철물도 팔아서 약간 정체성이 혼미한 슈퍼기도 하고, 슈퍼 자체가 집이라 11시반까지도 연다. 아주머니는 슈퍼 안쪽에는 집이 딸려있어서 가끔 뒤에 안쪽에서 공부안하는 딸을 혼내다가 나오시기도 한다. 그럴땐 저절로 마음속에 미소가 그려진다.

형제슈퍼아주머니는 헬스장에 자주 나타나신다. 동네 주민, 특히 상점주들과 같이 헬스를 하는 것은 독특한 감흥을 준다. 서로의 역할이 판매자와 손님에서, ‘다같이 운동하는 사람’이라는 지위로 만나 가장 무방비한 상태를 보이기 때문이다(뱃살도 보이고.). 여기도 밤 11시 반까지 열고, 연중무휴다. 어머님 신부름 때문에 가는데 식자재부터 과일, 야채까지 안파는게 없다. 삼흥슈퍼와는 다르게 집부분을 모두 터서 슈퍼만 하시는거 같다. 아주 옜날 슈퍼처럼, 아주머니는 오래된 장부를 읽고계시고, 200원 외상도 가능하지만, 다외우고 있기 때문에 안갚을 생각은 말아야한다.

갑자기 동네 교수님이 생각난다. 우리 옆집에 사는 분은 독일에서 유학하고 오신 미대 모 교수님 이라고 하셨다. 물론 지금은 파벌싸움? 같은 걸로 휴직중이시고, 복직이 안되고 계시다고 한다. 사실 집이 열려있을 때 잠깐 들여다 봤는데... 정말 미친 듯이 더러워서 정신병자가 사는 가 했더니 교수님이었다. 자기 창고에 그림도 많은데 보관할 수가 없다고, 남편은 연세대 교수라는데 왜 이런데 사는지 모르겠다고 아버지께 항상 푸념을 늘어놓으신다. 어머니께서 아버지가 다른분이랑 얘기하는걸 별로 안좋아하시기에 요즘은 잘 못본다.

고물상 할아버지가 생각난다. 우리집이 4동 106호, 그러니까 문패도 없는 창고방에서 살때에, 항상 집앞에 기웃거리시는 할아버지가 계셨다. 이 할아버지는 언제나 개를 데리고 다니시며 동네 고물을 줍곤 했었는데, 알고보니 집도 없고 조그만 창고에서 지내셨다. 주워온 고물은 마을 여기저기 에다가 ‘꼬불쳐’ 놓는다고 하시곤 했는데, 그중 한곳이 우리 집 뒤편이었다. 우리가족이 이사오기도 전에 우리집 뒷마당에다가 고물을 모아다 놓으셨기 때문에 우리는 할아버지를 쫓아낼 수가 없었다. 뭘 그렇게 줍고 다니시는지, 항상 수레에 열심히, 하루종일 고물을 모으셨고, 잘 팔지도 않으시는 거 같았다. 여기 동네의 대부분 노인분들이 그랬다. 돈도 주지 않아도, 항상 무언가를 줍고, 열심히 일하고 있었다. 마치 자신들의 존재가 일하면서 증명되듯이. 그러다가 자신의 영역에서 일하는 다른 사람이 오면 싸우고 이야기 하는 것이 하루일과였다.

호피무늬 원피스를 입고 와플을 파시던 아주머니가 생각난다. 동네에 보기드물게 생긴 이동식 와플장사였는데, 아주머니가 처음 장사를 하시는거 같았다. 이런 동네에서 누가 와플을 사먹겠냐만은, 아주머니가 짙은화장에 호피무늬 달라붙는 원피스를 입고 와플기계를 끌고다니는 것은 나름 보기 재밌었다. 하루 이틀 열심히 장사를 하시는거 같았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와플기계만 있고 사람은 없는날이 대다수였고 곧 문을 닫았다. 문 자체가 없었으니 그냥 망했다고 보는게 맞다. 사실 잘될 턱이 없었다.

그 무렵 나는 학군단에서 다른 학우들을 많이만났고, 좀더 남성스러워졌다. 사람에 대한 선입견이나 편견을 억지로 깨야만 했고, 더 깨졌다.

그러면서 우리동네 사람들이 점점 사람사는 맛이 나는 사람들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사랑스럽기 까지 했다. 사진을 찍거나 작업하러 돌아다니면, 귀신같이 나와서 말을 걸곤했다. 부담스럽기도 했지만, 마치 신기한 사람보는 마냥 물어보시는데 이제는 나도 줄곳 받아서 이야기하기도 한다.

이곳을 어떤 방식으로든 보여주고 싶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요양사 아주머니들

돈도없는마당에 오히려 도우미 아주머니가 생겼다. 할머니께서 장애인 등급을 받은 것이다. 노인요양 센터에서 매월 조금의 돈을 내면 요양보호사가 왔다. 우리할머니 성격은 너무나 까다로우셔서, 열 번정도 요양사가 바뀐거 같다. 오래 있던 분도있고, 아주 짧게 있던 분도 있다. 한번은 이상한 조선족 분이 온적이 있다. 일도안하고 뭔가 속이고, 할머니를 두고 자주 몰래 나가서, 당장 잘렸다. 생각해보면 요양사로 온 사람중에 좋은사람도 있지만, 나쁜사람도 더러있는거 같았다. 결과적으로 지금 계신 요양사분은 목사님이시다. 아주 훌륭하고, 항상 할머니를 위해 기도를 해주시는, 그런 분이다. 그렇지만 아주머니들이 집에 들어오셔서 일해주시면, 나는 매일 손님을 맞는거 같아 마음이 언짢았다.

내방.

한때 내 방을 만드는 작업을 하려고 했었다. 현재는 내방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집 방은 3개로, 엄마 아빠, 할머니, 그리고 동생이 각각 쓰고있기 때문에 내방은 없다. 지방에 내려가있던 동생이 올라오면서 방을 준 것이다. 아니 사실 주지 않았는데, 같이 자다가 뺐긴거다. 아무튼 나는 내방에서 혼자 자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게되었다. 이곳 저곳에 기웃거리며 자는 인생. 집이 가장 어려웠을 때도, 나는 집을 나가서 친구집이나 애인집에 얹혀자곤 했다. 그게 전혀 나쁘진 않았다. 젊고 돈도 많이 벌었으니까. 하지만 이젠 작은집이라도 집이 최고다. 엄마가 집이 어려워진 다음부터 손수 밥을 해주시기 때문이다. 내가 좋아하는 고기도 많이 사놓으시고. 손에 물하나 묻히지 않던 엄마가 벌써 요리가 많이 느셨다.

내가 집을 사랑하게 된건, 훈련이 많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훈련을 하면서 많이 다쳤는데, 사실 몸이 다친것도 있지만, 몸과동시에 마음도 많이 상했었기 때문이다. 훈련 때문 이라기보다, 방황하는 20대 초반에 나의 광기 때문에 많이 다쳤다. 아무튼 그때마다 도움을 준건 정성어린 부모님의 마음과 도움이었던 것이 분명하다. 복합적인 것들이 나를 집에 돌아오게 한거 같다. 그치만 아직도 이곳이 내 집이라는 것은 어색하다.

방태산.

2013년 중반기 즘에

시위가 있었다. 동네마다 방태산에서 시위행진을 출발하니 다같이 동참하자는 내용이었다.

아직도 벽에는 그때의 시위 자보들이 붙어있다.

시위가 성공적이라고는 못하겠지만, 어찌되었건 2013년 9월. 서울시 주최측의 파산으로 10조예산의 용산 국제 업무지구 사업은 막을 내렸다.

사업은 중지되었고, 개발을 하려던 손들도 모두 멈추었다.

처음에는 아주 다행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생각해보니 결과적으로 동네는 아무것도 발전이랄 게 없는 상태로 다시 방치되었다.

다시 원점이었다.

그로부터 약 1년정도 뒤에, 동네에 첫 편의점이 생겼다. 그때는 얼마나 기뻤던지. 우리동네도 조금씩 투자의 씨앗이 날려오고 있다는 기쁨과, 좀더 정상적인 동네 분위기가 된다는 안도감이 함께 일었다. 옆에는 작은 포차인 청춘포차도 생겼는데 장사가 아주 잘되는 모양이었다. 근방에 드루와라는 피시방도 생겨서, 하루종일 사람이 가득했다. 아주 작은 상점 몇 개가 생겼을 뿐인데, 마을에 활기가 돌았다.

다만 아직도 동네의 반쪽은 흰벽이 모든 풍경을 가리고 있다.

그렇게 2014년이 되고, 박원순시장이 동네에 찾아온다는 이야기가 돌았다.

시장이 온다고 뭐가 변하겠어... 라고 나는 생각했지만, 생각보다 큰 이슈였나보다. 마을사람들이 그렇게 많은지 몰랐다. 애고 어른이고 시장을 보러 하루종일 기다렸다.

예상시간보다 조금 늦은 7시즘에 시장은 왔다가 훌쩍 가버렸다.

그러고는 서부이촌동 개선사업이 시작되었다.

이촌동 소나무 사업

사실 말이 개선사업이지, 동네 간판들을 싸구려 아크릴로 좀 바꿔주고, 도로나 인도를 다시만들고, 가로등을 조금 고쳐준 것 외에는 변한게 없었다.

아니, 나는 눈치 채지 못했다. 2014년에는 정신없이 미디어 졸업전시를 했어야 했으니.

정신을 차려보고 2015년 초. 산책을 하며 오랜만에 동네사진을 찍는데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그렇다. 아파트 외벽이 깨끗해 진 것이다. 그리고 이상한 소나무그림이 솟아오르듯 등장했다.

지나가는 말로 엄마아빠가 티격태격한 것이 기억났다. 소나무를 그릴거냐 말거냐의 이야기였다. 서울시에서 공짜로 벽에 소나무를 그려준다고 했는데, 환경미화 사업이었다. 엄마는 찬성했고, 아빠는 거절했다. 왜 거절하는지 알 수 없었는데, 시위 글귀들이 모두 사라졌다.

정확히 시위 글귀들 위를 겨냥하여 소나무가 그려졌던 것이다.

생존권 사수라고 써있던 벽도 아기자기한 어린 친구들의 벽화로 덮였다.

무엇이 더 옳은 것일 까? 무엇이 더 우리에게 이로운 것일까?

나는 현재도 이촌동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어떠한 개발도 없이 용산 국제 업무지구는 무성한 풀과 유령건물들만 서있고, 우리 동네도 사람이 사는 발전 없는 동네다.

시장이 한번 지나가고, 그 오랜 환경 개선사업 결과, 벽과 도로와 가로등 등이 이쁘게 덮였다고, 왜 모든 문제들이 마치 해결된 마냥 조용한 것일까.

일단 당장은 길거리가 쾌적한게 좋은 것이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지나가곤 한다.

개발의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문제가 생긴모양.

용적률 300%.

효창.

효창공원역 근처의 재건축현장. 전체를 내려다볼 기회가있었다.

공사의 굉음과. 공사현장이 얼마나 시원해 보이는 지 몰랐다.

생동감 마저 느껴졌다. 우리집도 당장은 나가겠지만, 저렇게 될 수 있을까.

저렇게 부서지고 다시 무언가가 들어설 수 있을 까!

그곳은 지옥같았다. 집에들어가면 할머니부터... 모두가 한침대에 한바닥에 누워서있었다.

그런데 행복했다. 마음의 벽, 실제 각방을 쓰던 우리가족은 억지로라도 한방에 있어야 했다. 서로 숨길수 있는 방도 없었고 모든게 다 들렸다. 가족. 식구. 라는 것처럼... 서로가 부둥켜 있어야만 살아갈 수 있었다. 말그대로 부둥켜야만 따듯했다. 니방 내방도 없어지고... 모두가 같이. 이사를 세 번한 조금 나은집에 왔지만, 지금도 나는 부모님과 한방을 쓴다. 그것이 대개 창피한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닥분에 나는 부모님과 함께 작업까지도 하는 행복한 아들이 되었다.

돈은없지만 행복했다. 지금도 . 작품을 마음으로 도와주시고, 항상 신경써주시는 어머니 아버지 덕에, 나는 내가돈을 벌고, 장학금을 타서 온전히 작품에만 쓸수 있게 해주셨다. 덕분에 나는 정말 부족함 없이 작업했고 혼신의 힘을 다할 수 있었다.

서부이촌동 장벽.

서부이촌동에는 동을 모두 에워싸는 거대한 벽이 있다. 이 벽은 위로는 한강로동(용산역 부근)과 양 옆으로는 마포와 동부이촌동을 나누는 벽이다.

마치 베를린 장벽같이 한강로동(용산역 부근 번화가)과 동부이촌동으로부터 격리되어야 하는 듯이 펼쳐진 벽은 높이 약 4.5미터로서 우뚝 솟아있다. 이 벽은 2013년 서부이촌동 통합개발이라는 명목 하에, 동네를 통째로 드러내고, 용산 국제업무지구로 탈바꿈 하려는 서울시의 개발사업이 발족하면서 생기게 되었다. 2013년 말, 개발기획사(드림허브)의 파산으로 계획이 중단되면서 주민들의 시위는 멎었지만, 벽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이촌 2동, 즉 서부이촌동에는 이사오는 사람이 근 7년간 존재하지 않았다. 유출인원은 있으나 유입인원은 거의 존재하지 않아서 부동산 매각이 정지되어 있다. 이렇기 때문에 어떠한 투자나 개발이 없게되었고, 거리는 예전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게 되었다. 옛 기찻길과 새마을운동 시절의 주택들이 여러번 보수되어 시멘트 자국을 가지고 존재한다. 집들은 각기 다른 문짝으로 변형되었고 주민들의 필요에 의해 개조되었다. 작가는 이런 동네에 흥미를 느껴 이곳의 주민으로서 3년간 사는동안 지속적으로 사진을 찍어왔다.

사진들을 정리하는 도중,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하였는데, 동네의 벽화에 대한 것이었다. 2014년 말부터 생기기 시작한 이촌동 벽화는, 서울시의 추친으로 무료로 제공되었다. 2015년인 지금에는 여기저기 벽화가 생기기 시작하였는데, 이 벽화의 목적은 그동안의 시위의 흔적들을 지우기위한 것이었다. 나는 시위의 흔적들을 찾아서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그것들을 같은 각도에서 찍고 비교한다.

시위가 끝난 지금, 거리는 조용하다. 노인들과 쫓겨온 사람들은 언젠가 있을지도 모를 개발을 기다린다.

벽들을 그린다. 벽은 단순한 경계가 아닌, 근 10년이라는 기간동안 멈춰버린 동네, 그리고 개발을 원하는 사람들의 열망, 서울시의 부정적 개발행위와 그것으로부터 동네를 지켜낸(마치 방어벽과 같이) 흔적, 그리고 다시 개발을 요구하는 사람들의 기대심 등을 모두 포함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개발을 하기위한 시의 부정행위, 관심으로부터 격리된 사람들, 부정한 개발을 중지하고 새 개발을 바라는 주민들의 열망.. 개발로부터 스스로를 지키자하는 마을, 벽을 없애고 새롭게 개발을 하고자하는 마을,,, 등을 복합적으로 상징한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개발을 바라는 사람들의 열망, 격리된 동네

언제부턴가 새하얀 벽이 붉은색과 푸른색으로 다가왔고, 마치 해일과 쓰나미처럼 느껴졌다.

언제 집어 삼켜질까. 와 언제 허물수 있을까 사이의 갈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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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 국제업무지구 터는 7년째 방치되고 있다. 나는 이곳을 그린다. 마치 오래된 유적지처럼, 멀쩡한 건물들 사이 사이로 풀과 이끼들이 마구잡이로 자란다. 회색풀에 덮인 도시. 회색벽은 붉게 보인다.

<이민자1, 2>

작업 이민자 는 내 동네의 상황에서 모티브를 얻었다. 서울도심의 한복판에 존재하는 노른자땅, 혹은 노른자와 흰자의 사이의 개발의 사각지대인 . 개발계획의 사각지대에 존재하면서 발전하지못한 땅. 그곳은 시간도 사람도 일도 다 정지해있는듯 싶었다. 주변의 발전되는 도시거리와 다르게 어울리려 발버둥치나 도저히 어울릴수 없는 고립된 공간. 이곳을 대표할 물건이 뭔가 찾다가 공사장 가벽이 떠올랐다. 이쪽과 저쪽을 구분하는 가벽이면서 이쪽 혹은 반대쪽을 개발구역으로 규정지으면서, 그러나 개발이 멈춰 영원히 없어지지않는 우리동네 공사벽. 그것하나를 가져다가 다른 좋은 가벽들사이에 놓아본다. 역시 어울릴 수없는듯 싶다. 분도칠하고 다시회색으로도 칠해본다.

이곳에서 사는사람. 무리속에서 이민자처럼살아가는 자들에대한 인상을 표현하고싶다.

이민자. 작업 이민자 시리즈는 나와 내 삶의터잔이 마치 고립된 그리고 주변의 도시지약으로부터 외면된 동떨어진 인상으로 출발했다. 내가사는곳은 마치 서울시에서는 있어선 안될것같은 주변의 발전된곳보다 낙후된 정지된도시이다. 개발의목소리와 반대의목소리가 모두 정지한곳에 남은것은 동네를 나누는 가벽과 흔적들이다. 나는 이 것들을 생산적인 서울대학교의 공사현장에 옮겨놓는다. 이촌동에서 여기까지 오는 재료들은 모두가 이현장에 끼워맞추기위해 다시만들어지지만, 결코어울릴수없다. 두가지가 만날때 굉음은 그것을 더 적나라하게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