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그림에서는 풍경 속에 인물들이 사라지기 시작한다. 그림 <바다 속에 해가 있었다>나 그림 <프뉴마>에서는 흐느끼거나 웅크린 이미지의 인물이 등장하는 대신, 보다 붓터치와 색, 폭발하는 듯한 형태가 강조된 풍경이 화면을 채운다. 이것은 단순히 인물이 사라진 그림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흐느끼거나 광광우는 인물은 초기에 존재하지 않았었는데, 몇 그림에서 점점 커지게 되었다. 이것은 좀 더 자신있게, 직설적으로 나의 슬펐던 기억에 대하여 애도하고, 나의 트라우마를 공개하는 행위였다. 그러나 이러한 고통의 직접적 표현이며, 강하고 자신있는 애도로서의 이 인물이 이제 사라지기 시작한다. 나의 직접적인 고통이 긴 애도의 과정, 그림그리기를 통해 옅어졌기 때문이다.

<프뉴마>는 이러한 인물이 사라진 이후의 풍경표현 양상을 보여주는 그림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전의 인물과 풍경 형상의 구도에서 인물만 사라진 채로 풍경이 등장하듯 보인다. 기존의 스케치와 드로잉에서는 인물이 존재했으며, 이것은 더이상 인물의 역할이 중요치 않다고 판단한 필자에 의해 생략되었다. 대신 어떠한 오로라와 같은 형상을 나타내는 붓질이 윗부분에 존재하고, 주변에 얇은 붓질로 여러번 겹칠해진 덩굴의 이미지, 그리고 절벽의 이미지만 보이게된다. 이것은 필자의 옅어진 기억 보다도 그림 표면의 붓질과 형상의 시각적 표현이 더 중요해짐을 나타낸다.무광으로 칠해진 어두운 영역에, 광택과 높은 발색의 푸른 덩굴들이 부유한다. 이렇게 풍경이 주가 되며 그림을 가득채우는 표현을 유지한다.

 이렇게 풍경이 화면을 가득 메우는 그림은 <바다 속에 해가 있었다>에서 더욱 강조된다. <바다 속에 해가 있었다>는 내가 병원에서 퇴원 후 치료를 종료한 시점에서 잠시 만난 모 연예인이 들려준 이야기였다. 나의 그림의 모티브인 물과 파도에 대해서 이야기 하다가 바다 속에 해가 있으면 어떨까? 라는 위트로 시작된 이야기였다. 그러나 물 속에 태양이 존재한다는 것 만큼 지금의 기억을 변모시킨 나의 내면 세계을 표현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되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나는 회복되었고, 또 다른 국면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고통과 트라우마의 시리즈는, 일단락 시키려 한다.

다음은 무엇일지 기대된다.